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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작소설/기타, 단편

낙서 (1) : 낙서

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. 5. 31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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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러니까 나는 아까 까지만 해도 여러 술잔 돌리기에서 기분좋게 놀던 중 이었다. 그런데 지금은 정신을 차려보니, 아까 전 까지 내게 기대서 자던 아가씨를 등에 업고 아가씨의 술취한 말투와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다리를 옮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.

"직진, 직진, 쭉가요"
"아, 예에. 계속 가면 되죠?"

나도 상대도 서로 기억 조차 못 하는 상황을 억지로 설명하는 것은 보통 열일곱배 정도 힘들거라 생각하고, 그냥 지금의 상황에 몸을 맡긴채로(정확히는 업은채로 이겠지) 투벅투벅 발걸음을 옮겼다.

"나, 있잖아요. 너무 믿음직 한 느낌이 드는 사람은 처음이예요. 이렇게 업어주고 나서 이렇게 되고 나서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가 걱정이예요. 나 업혀서 가는거 처음이거든요. 나 한테 접근하는 남자들은 내가 태권도하고 이종격투기를 배워서 다 때려주고..."

무슨 이종격투기가 어쩌고.. 이미 주절주절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굉장히 무리다. 이야기도 엉망진창 인데다가. 더 중요한건 이미 내 허리에 힘이 빠지고 있다. 게다가 귓가에서 맴도는 그녀의 입김이 어딘지 모르게 성가셨다. 일부러 그러는 건지.

"나 있잖아요 조금만 앉아있다가 가면 안되요? 너무 힘들어 하는것 같은데 나 앉았다가 갈래요."

그래도 남자로써 체면이 있지. 나는 찡그린 얼굴을 돌리며 내뱉었다.

"아녜요. 가는데까진 갈게요. 쉬는것은 나중에."

걸어가는 길이 참 멀고도 멀다. 그래, 허리가 부러지든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든 간에. 남자는 존심이고 가오다.

'탁!, 탁!, 탁!'
"저기, 저기."

응? 잘 업혀 가던 그녀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.

"잠깐, 잠깐. 나 토할거 같아요."

뭐뭣? 무슨 지거리야!! 그건 안된다. 그것 만큼은 안된다.

"예. 잠깐 내려 드릴게요."

말은 잠깐이지만 번개처럼 내렸다. 그녀를 내려주고는 많은 술의 양 탓인지 오바이트의 포지션을 잡고있는 그녀의 등뒤에 서서, 혹시 나 토사물이 범벅이 될 머리칼이 걱정된지라. 머리를 뒤로 묶어주고, 등을 살살 두드려 줬다.
허나, 한다던 토는 않고, 빙글 내쪽으로 돌아서서 이야기 한다. 이거 위험하다.

"저기..."

사실은 술자리에서부터 그녀의 포스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느꼈지만. 갑작스레 그녀가 꽉 잡아버린 내 다리에 잠시나마 섬짓한 기운이 돌았다.
이윽고,

"나, 조금만 안아주면 안되요? 나랑 키스 안하고 싶어요?"

내 두 다리를 꽉잡은 손을 미끄러뜨리며 나를 올려다는 정말이지, 어제 본 신작AV에나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입을 벌리는 그녀를 조금 쳐다보다가 이건 아니겠다 싶어 눈을 피해 벽을 바라보았다.
그 빨간벽에는 나를 비웃듯 조그만 글씨로 낙서가 되어 있었다.


『빠구리』



'젠장.'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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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06년 4월 6일 18:02에 썼던 소설의 복원 그리고 수정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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